“나는 왜 안 죽였을까” 침묵을 깬 이춘재 전처의 증언과 남겨진 질문
화성 연쇄 살인의 진범으로 특정된 이춘재. 그와 함께 살았던 전처의 육성이 공개되면서, 범죄의 잔혹성과 별개로 일상에 스며든 공포의 결이 드러났다. 이번 증언은 범죄사실의 나열을 넘어, 피해와 생존, 그리고 사회가 놓친 공백을 돌아보게 한다.
1. 전처의 침묵이 깨지기까지
한 사람의 삶을 휘감은 공포는 쉽게 언어로 올라오지 않는다. 이 사건도 마찬가지였다. 오랜 시간 침묵을 지켜온 이춘재의 전처가 다큐멘터리를 통해 조심스레 입을 연 배경에는, 개인적 회복을 위한 용기와 더 늦기 전에 기록되어야 할 진실이 있었다. 그는 “지금 와서 무슨 소용이 있나 싶다가도, 남겨진 사람들이 겪은 시간을 알아주길 바랐다”는 취지로 자신의 기억을 정리했다.
그의 증언은 선정적 폭로가 아니다. 생활의 결을 따라가며 사건 이전과 이후, 그 사이에 끼어 있던 수많은 징후들을 묵묵히 보여준다. 같은 사실이라도 피해자의 시간으로 재구성될 때, 우리는 전혀 다른 장면과 질문을 마주한다.
2. “낮엔 수줍은 사람, 밤엔 악몽” 두 얼굴의 일상
그가 전한 첫 인상은 깔끔함과 시간 약속에 철저한 태도였다. 일터에서의 단정함은 신뢰로 이어졌고, 연락은 주로 집 전화로만 이뤄졌다. 그 자체로 이상할 것 없는 점들이 누적되며 일상으로 자리 잡았고, 경계심은 자연스럽게 낮아졌다.
하지만 사적인 공간에 들어오면 분위기는 바뀌었다. 낮의 얌전함은 밤의 냉혹함으로 치환되곤 했다. 가족의 눈치와 주변의 시선을 피해, 폭력은 집 안에서 ‘조용히’ 자랐다. 바깥에서 본 사람과 집 안에서 겪은 사람 사이의 간극은, 피해자가 스스로를 의심하게 만드는 가장 잔혹한 장치가 되기도 했다.
“집 안에선 다른 사람이었다. 눈빛이 바뀌는 순간이 있다. 그때는 어떤 말도 통하지 않았다.”
3. 통제와 ‘루틴’: 폭력은 어떻게 생활이 되었나
전처의 증언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키워드는 ‘루틴’이다. 그의 하루와 주간 패턴은 정밀했고, 어긋남에 대한 분노는 곧바로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향했다. 이러한 통제의 감각은 단순한 성격 문제가 아니라, 관계 전체를 지배하는 권력 작동 방식으로 보인다.
폭력은 폭발처럼 보이지만 사실 늘 준비되어 있다. “뜻대로 되지 않으면 화풀이”라는 말에는, 상대의 행동과 감정을 교정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다. 피해자는 그 루틴에 맞춰 움직이는 법을 배우게 되고, 결국 스스로를 ‘조심시키는’ 단계로 밀려난다. 이 과정에서 외부와의 연결은 끊기고, 구조 신호는 희미해진다.
전문가들은 가정 내 통제가 지속될 때 피해자가 자신의 판단을 의심하게 되는 ‘가스라이팅’ 양상을 지적한다. 폭력과 사과, 돌봄을 흉내 낸 보상(예: 멍을 없앤다며 약을 사오거나 생계 송금을 통제하는 방식)은 혼란을 강화하며, 탈출을 더 어렵게 만든다.
4. 문이 잠긴 집: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의 단서들
그가 자주 보여준 행동 중 하나는 문을 잠그고 응답하지 않는 것이었다. 잠깐의 외출 뒤에도, 아무리 두드려도, 전화해도 문은 열리지 않았다. 열쇠공을 불러 들어가면 그는 조용히 식탁에 앉아 문만 바라보고 있었다고 한다. 이 행위는 공포를 확장하는 방식이자, 일상 공간을 ‘폐쇄된 무대’로 전환하는 신호처럼 보인다.
심리학적으로 볼 때, 반복적 폐쇄와 무응답은 상대에게 ‘권한이 없다’는 사실을 학습시키는 효과가 있다. 이는 물리적 감금의 여부와 무관하게 심리적 감금을 성립시킨다. 피해자는 일상적 출입, 통화, 경제 활동 같은 기본 권한을 상실해 나가고, 결국 ‘요구하지 않는 법’을 배우게 된다.
5. 가족의 파열과 남겨진 죄책감
전처는 “가족들도 원망한다”는 말을 털어놓았다. 친밀한 관계에서 벌어진 폭력은 당사자에게만 상흔을 남기지 않는다. 가족, 친지, 지역 사회까지 파문은 번진다. 누군가는 ‘왜 몰랐느냐’, ‘왜 떠나지 않았느냐’고 묻지만, 통제와 고립이 낳는 무력감은 그 질문 자체가 얼마나 잔인한지 일깨운다.
폭력이 일어난 공간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종종 죄책감을 떠안는다. “내가 다르게 했더라면” 같은 반문은 피해자를 다시 사건 중심으로 끌어오고, 삶의 주도권을 박탈한다. 그렇기에 도움의 언어는 ‘왜’가 아니라 ‘어떻게 도울까’여야 한다. 사회가 피해자의 선택을 평가하는 대신, 구조와 회복을 위한 안전망을 제시해야 하는 이유다.
6. 사건의 연대기: 자백과 공소시효의 그림자
이 사건은 오랜 기간 미제로 남았다가, 재수사를 통해 자백과 과학적 증거가 맞물리며 진범이 특정되었다. 다만 다수의 사건은 공소시효 만료로 형사처벌로 이어지지 못했다. 법 앞의 시간은 멈추지 않지만, 피해자의 시간은 그 자리에서 멈춰버린다.
- 연쇄 범행은 화성과 인근 지역을 중심으로 장기간 이어졌고, 성범죄와 살인이 결합된 형태가 반복되었다.
- 재수사 단계에서의 자백과 DNA 분석은 진실을 끌어올렸지만, 법제의 한계로 상당수 사건은 ‘공소권 없음’으로 종결됐다.
- 사건 처리의 공백은 피해자와 유가족에게 2차 피해를 남겼고, 국가 책임과 사과, 회복적 조치의 필요성을 부각시켰다.
시간이 흐르며 바뀐 제도적 환경을 고려할 때, 공소시효 제도의 재검토와 장기 미제 수사의 표준화, 증거 보존 체계의 강화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범죄의 시간과 피해의 시간 사이 공백을 메우는 일이기 때문이다.
7. 생존자 관점에서 본 ‘2차 피해’와 사회적 과제
사건이 다시 공론화되면, 생존자는 새로운 시선과 질문의 중심에 서게 된다. 온라인 댓글, 주변의 수군거림, 부정확한 정보의 확산은 또 다른 상처가 된다. 인터뷰에서 전처가 “한 사람 때문에 인생이 망가졌다”고 말했을 때, 그 문장에는 사회가 충분히 곁에 서주지 못한 시간도 함께 담겨 있었다.
우리가 체크해야 할 것은 세 가지다. 첫째, 폭력 신호를 조기에 감지할 수 있도록 이웃·직장·의료 현장에서의 연계망을 촘촘히 하는 것. 둘째, 피해자가 도움을 요청했을 때 즉각적으로 접근금지, 임시 보호, 법률·의료·심리 지원이 원스톱으로 작동하는 시스템을 보장하는 것. 셋째, 보도와 온라인 담론에서 피해자 비난을 멈추고, 사실 확인과 맥락을 중심에 두는 윤리를 지키는 것이다.
8. 다큐멘터리로 드러난 목소리, 우리가 읽어야 할 맥락
이번 다큐멘터리는 과거 뉴스가 담지 못한 ‘생활의 단서들’을 보여줬다. 모텔 창밖으로 스쳐 지나간 장면, 문을 잠근 채 말없이 앉아 있던 모습, 돈을 건넬 때조차 통제의 수단으로 삼던 습관. 이 세부들은 범죄의 기술이 아니라, 폭력이 어떻게 일상으로 충전되는지에 대한 단서다.
다큐멘터리는 또한 질문을 남긴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 이상 신호를 감지할 수 있을까. 주변인이 미묘한 이상함을 목격했을 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그 답은 제도와 시민 감수성이 함께 움직일 때 비로소 현실이 된다.
9. 재발 방지를 위한 제도적 체크리스트
1) 증거 보존과 장기 미제 수사 역량 강화
디지털 기반의 증거 관리, 장기 보존 표준, 지자체-경찰-검찰 간 데이터 연동은 반복적으로 지적되어 온 과제다. 특히 성범죄와 살인 복합 사건은 초기 대응의 정밀도가 결정적이다.
2) 공소시효 제도 재검토
가혹 범죄에 대한 공소시효 폐지 혹은 연장, 중대 범죄의 시효 정지 사유 확대 등은 국제적 논의 흐름과도 맞닿아 있다. 법의 시간이 피해자의 시간과 엇갈리지 않도록 설계를 조정할 필요가 있다.
3) 피해자 중심 원스톱 지원
신속한 신변보호, 접근금지 명령의 실효성 강화, 의료·법률·심리치료 연계, 생계 지원은 회복의 토대다. 신고의 문턱을 낮추면서 2차 피해를 최소화하는 설계가 관건이다.
4) 보도 윤리와 온라인 환경 정비
선정적 재현을 경계하고, 피해자 신상과 사생활 보호를 최우선으로 하는 가이드라인이 필요하다. 플랫폼 차원의 허위정보 확산 억제, 댓글 관리 원칙도 병행되어야 한다.
10. 남겨진 질문들
전처가 털어놓은 “나는 왜 안 죽였을까”라는 문장은 사건의 잔혹함을 한 문장으로 압축한다. 동시에 그 문장은 생존자의 문장이기도 하다. 살아남았다는 사실이 죄책감이 되지 않도록, 사회는 다른 종류의 답을 준비해야 한다.
이 사건을 다시 떠올리는 일은 고통스럽다. 그렇지만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폭력은 늘 일상에서 시작되고, 신호는 대개 작고 조용하다. 그 작은 신호를 알아차리고, 개입하고, 곁에 서는 기술을 사회 전체가 배워야 한다. 그것이 남겨진 사람들에게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다.
이 글은 공적 기록과 방송에서 드러난 증언을 토대로, 피해자 관점을 중심에 두고 재구성한 해설 기사입니다. 선정적 서술을 지양하고, 사건의 맥락과 사회적 과제를 함께 짚는 것을 목표로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