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그곳에 남은 이름 박영석 전설이 된 대장의 마지막 약속과 끝없는 도전
히말라야 14좌, 7대륙 최고봉, 북극점과 남극점까지. 누군가에겐 불가능이지만, 그에겐 “끝까지 가보는” 질문이었습니다. 방송 리뷰를 넘어, 기록 뒤에 숨은 선택과 책임,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 남긴 숙제를 차분히 풀어봅니다.
전설이 된 이름을 다시 부르는 이유
방송 한 편이 끝나면 보통은 여운이 희미해집니다. 그런데 박영석이라는 이름은 이상할 만큼 오래 귀에 남습니다. 단지 유명해서가 아니라, 그의 이야기가 ‘해냈다’에서 멈추지 않고 ‘왜 했는가, 그 뒤엔 무엇이 있었나’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건네기 때문이겠죠.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다 보면, 화려한 정상 사진보다 준비 과정과 결정의 순간들이 더 선명하게 떠오릅니다. 자금이 없어 신혼집을 담보로 잡고, 후원사를 설득하러 문을 두드리고, 팀원들과 위험을 공유하며 매일의 기상과 루트를 점검하는 일. 전설은 그렇게 지루하고 단단한 일상에서 만들어졌습니다.
이 글은 이미 널리 알려진 업적을 반복하기보다, 그 업적이 가능했던 태도와 기준, 그리고 지금 우리의 생활과 일에까지 스며드는 몇 가지 실마리를 중심으로 정리해보았습니다.
산보다 높은 의지 기록보다 어려운 선택
무모함과 결단 사이
“1년 안에 히말라야 5좌.” 당시로선 무모에 가까운 목표였지만 그는 6개월 만에 해냈습니다. 중요한 건 속도 자체가 아니라, 왜 그가 그 타임라인을 설정했는가입니다. 후원을 얻기 위해선 분명한 로드맵이 필요했고, 팀 운영을 유지하려면 이정표가 있어야 했습니다. 고산은 체력이 전부가 아니라 시스템의 싸움이라는 것을 그는 누구보다 잘 알았습니다.
자금과 운영 현실을 가르는 선
고산 원정은 항공과 운송, 셰르파 고용, 장비·식량·의료, 보험과 구조 대비까지 복잡한 예산표 위에서 굴러갑니다. 그가 초기에 택한 담보 대출은 위험했고, 동시에 팀의 생존 전략이었습니다. 이후 기업과의 파트너십을 설계해 ‘성과-재투자’의 선순환을 만들었고, 이것이 장기 원정의 동력이 됐습니다.
기술은 축적된 습관
빙벽·혼합 등반, 고정 로프 설치와 고도 순응 루틴, 일기 분석과 하이캠프 운영까지. 기록의 바탕엔 ‘매일 반복된 검증’이 있었습니다. 산악계에서 그를 ‘독종’이라 불렀던 이유는 위험을 무시해서가 아니라, 위험을 관리하는 과정에서 타협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리더십의 본질 대원과 가족 사이에서
배우 송강호가 전한 첫인상처럼, 그는 강단 속에 온기가 있었습니다. 대원들의 장비 체크리스트를 직접 만들고, 고소 질환 초기 증상을 서로 기록해 공유하게 했으며, 내일 움직임을 모두 이해할 때까지 브리핑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산에서 리더십은 말투가 아니라 절차로 드러납니다.
가족을 향한 마음은 선택의 무게를 더했습니다. 아이들 사진과 편지를 언제나 가방에 넣고 다녔다는 사실은 유명합니다. 그러나 그 장면을 소비적인 감상으로만 볼 필요는 없습니다. 위험 직업의 종사자들이 지켜야 할 ‘설명 책임’과 ‘합의된 위험(assumed risk)’의 문제를 그는 솔직하게 마주했습니다. 등반은 개인 스포츠가 아니라 공동체적 행위라는 걸 그는 알았습니다.
한국 루트의 꿈과 대가 에베레스트 남서벽 이후
국적을 이름으로 새기는 일은 상징이지만, 고산에서는 곧 생명과 연결됩니다. ‘코리안 루트’는 다음 세대에게 남기는 좌표였습니다. 문제는 난이도였습니다. 에베레스트 남서벽은 세계적으로도 악명 높은 구간. 그는 가장 신뢰하던 대원들과 도전했고, 눈사태로 두 동료를 잃었습니다.
그 슬럼프는 길었습니다. “산이 나를 밀어낸다.” 산을 좋아한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아픈 고백입니다. 그리고 그는 멈추는 법도 배웁니다. 멈춤은 포기가 아니라 재정립이었습니다. 안전 기준을 다시 세우고, 팀 구조를 돌아보고, ‘왜’ 해야 하는지의 답을 가다듬는 시간. 고난 뒤에 돌아온 도전은 그래서 더 신중했습니다.
안나푸르나 남벽 마지막 교신 이후 남은 것들
안나푸르나 남벽은 히말라야 3대 난벽 중 하나로, 70도 이상 경사의 얼음·혼합 지형이 이어지는 곳입니다. 폭설과 매서운 낙빙, 잦은 눈사태가 위험을 증폭시키죠. 2011년, 그는 다시 동료들과 그 벽을 향했습니다. 이후 교신이 끊겼고, 시신은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내가 산에 묻히거든 가족에게 데려다 달라.” — 생전에 동료들에게 남겼다는 그의 당부
수색은 끝이 없었습니다. 원정 가방 속 가족 사진과 편지만 돌아왔습니다. 남겨진 이들은 산을 향해 매년 발걸음을 옮기며 약속을 기억합니다. ‘그곳에 아직 있다’는 말은, 물리적 의미를 넘어 마음속 좌표가 되었다는 뜻일 겁니다.
숫자 너머의 의미 산악 그랜드슬램이 말하는 것
그랜드슬램의 구성과 함의
히말라야 14좌 완등, 7대륙 최고봉 등정, 북극점과 남극점 도달을 모두 이루는 일은 단순 나열이 아닙니다. 각 프로젝트는 완전히 다른 리스크 모델과 기술 스택을 요구합니다. 고산 고정 로프·캠프 운영과 극지의 썰매 운행과 내비게이션, 체온·에너지 관리 방식은 유사점보다 차이가 큽니다. 결국 그의 그랜드슬램은 ‘학습 전이’의 성취였습니다. 다른 환경의 기술을 흡수해 자신의 운영 체계로 통합하는 능력 말이죠.
한국 스포츠 문화에 남긴 메시지
그는 “내가 아닌 한국인이 해낸 일”이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개인 영광을 집단의 저력으로 환원하는 문장. 성과를 포장하려는 슬로건이 아니라, 후원과 응원으로 만들어지는 공공재로서의 성취를 이해한 태도였습니다. 이는 지금도 다양한 모험 스포츠와 아웃도어 문화의 기반이 되고 있습니다.
그가 남긴 말과 오늘의 과제 안전과 준비의 기술
그의 이야기를 영웅서사로만 남기면 아쉽습니다. 남겨진 과제는 구체적입니다. 산악계와 아웃도어 커뮤니티에서 실천할 수 있는 체크리스트를 간추려 봅니다.
- 사전 정보와 기상: 다중 소스 예보, 현지 가이드·셰르파 네트워크 리포트 교차 확인
- 팀 운영: 역할 분담, 비상 결정권자 지정, 철수 기준의 사전 합의와 문서화
- 의료·구조: 고소증·저체온·동상 대응 키트 및 교육, 위성 통신·PLB 장비 점검
- 환경 윤리: 쓰레기 회수, 고정 로프·캠프 자원 회수 원칙, 현지 커뮤니티와 상생
- 정신적 회복력: 실패와 멈춤을 전략으로 받아들이는 문화 만들기
그가 보여준 ‘멈출 때 멈추는 용기’는 결국 최고의 안전 장비였습니다.
증언으로 이어지는 사람냄새 동료와 대중의 기억
그를 가까이서 본 이들은 공통적으로 말합니다. 차갑게 보이지만 먼저 손 내밀던 대장, 마지막에 자신의 몫을 더 챙기던 사람. 방송 속 리스너들의 울먹임은 과장이 아니었습니다. 산을 오르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을 올려 세우는 리더였다는 증언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 힘을 얻습니다.
그의 기록을 읽는 일은 누군가의 영광을 소비하는 행위가 아니라, 우리가 내일 결정할 작은 선택의 품질을 높이는 준비입니다.
산에 묻힌 질문들 윤리·환경·전통의 이어달리기
요즘 고산 원정은 상업적 등반, 인파와 쓰레기, 현지 노동의 안전 문제까지 복합적 논쟁을 동반합니다. 전통적 알파인 스타일과 대규모 원정 방식의 공존도 숙제죠. 그가 남긴 ‘한국인의 저력’은 더 빠르고 높이 오르자는 구호가 아니라, 더 바르게 오르자는 다짐에 가깝습니다.
- 윤리: 소유가 아닌 공유의 기록, 팀 안팎의 공정한 크레딧
- 환경: 최소 흔적 원칙의 표준화와 교육의 상시화
- 전통: 선배 세대의 루트와 보고서를 아카이브하고 다음 세대가 쉽게 접근하도록 공개
산은 늘 그 자리에 있지만, 등반 문화는 우리가 만드는 것입니다. 전설은 결과가 아니라 기준이 됩니다.
기억하는 방식들 작은 아카이브가 되는 일상
거창하지 않아도 됩니다. 책 한 권, 인터뷰 한 편, 낡은 사진 한 장을 곁에 두는 일. 등산 기록을 남기는 습관, 팀과 함께한 실패의 이유를 적어두는 일. 이런 소박한 아카이브가 다음 도전을 바꿉니다. 그의 가방에서 돌아온 가족 사진처럼, 우리의 일상도 누군가의 길잡이가 될 수 있습니다.
“1%의 가능성이 있다면 포기하지 않는다.” — 가능성에 대한 예의는, 충분한 준비와 책임으로 완성됩니다.
마무리 우리가 받아 든 바통
박영석 대장은 어쩌면 안나푸르나의 바람 속에 여전히 서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건, 우리가 그의 이야기를 오늘의 언어로 옮겨 담는 일입니다. 과장 없이, 신화가 아닌 표준으로. 한 사람의 완주가 많은 사람의 출발선이 될 때, 전설은 비로소 현재가 됩니다.
이 글은 알려진 사실을 토대로, 중복을 피해 맥락과 의미를 재구성했습니다. 기록은 기억 속에서 계속 자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