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EC 36년’ 협력의 역사와 2025 경주 CEO 서밋: 연대·공급망·AI로 여는 다음 10년
보호무역 기류와 기술 전환의 파고 속에서 APEC은 다시 연결과 신뢰를 강조하고 있다. 36년의 성과를 돌아보고, 경주 CEO 서밋에서 제시된 공급망·디지털·AI의 새 의제를 현장감 있게 정리했다.
APEC 36년, 무엇이 달라졌나
APEC은 1989년 출범 이후 회원 경제권 간 관세 인하, 투자 촉진, 표준 조화 등 실용적인 의제에 집중해 왔다. 36년을 돌아보면 ‘협력하면 성장의 파이가 커진다’는 단순한 명제에 꾸준히 힘을 실은 셈이다. 자유화·원활화·경제협력이라는 세 축의 추진 방식은 지금도 유효하다.
하지만 외부 환경은 크게 달라졌다. 글로벌 공급망 재편, 지정학적 리스크 확대, 디지털 규제와 데이터 안보, 탈탄소 전환까지 경제의 작동 원리 자체가 바뀌는 중이다. 이런 상황에서 APEC은 규범과 신뢰를 중심으로 다시 한번 ‘연결’의 효용을 증명해야 한다.
36년의 궤적이 말해주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위기 때일수록 연결의 비용보다 단절의 비용이 훨씬 크다. 이것이 APEC이 재조명되는 이유다.
경주 CEO 서밋의 의미와 현장 공기
경주에서 열린 CEO 서밋은 정부와 기업이 같은 테이블에서 해법을 찾는 자리였다. 무대 바깥의 대화 주제도 단출했다. 공급망 위험 관리, 시장 접근성, 규제 예측 가능성, 그리고 AI 전환이 불러올 산업 구조의 급변. 참석자들의 관심사는 결국 ‘불확실성 속 실행’을 어떻게 담보하느냐로 모였다.
현장 발언에는 연대와 실용이라는 두 단어가 반복됐다. 보호무역의 벽이 높아질수록 기업은 우회로와 협업 모델을 찾아야 하고, 정부는 그 틀을 제도화해야 한다. CEO 서밋은 이 간극을 좁히는 가교 역할을 분명히 했다.
요지는 간단하다. 시장이 흔들릴수록 신뢰를 제도화하는 다자 플랫폼의 가치가 커진다. 올해 경주는 그 사실을 확인시켜 준 무대였다.
공급망 협력: 불확실성 시대의 안전망
리스크의 다층화
공급망 리스크는 이제 단일 사건이 아니라 복합 위기의 형태로 온다. 지정학, 기후, 사이버, 규제 변화가 동시다발적으로 얽힌다. 기업 입장에선 단가보다 복원력(resilience), 효율보다 가시성(visibility)이 우선순위로 올라왔다.
APEC의 역할 재정의
APEC 차원의 공급망 논의는 표준화된 리스크 분류, 정보 공유 프로토콜, 공공·민간 간 위기 대응 연습으로 확장되고 있다. 민관 합동 포럼을 통한 상시 대화 채널이 작동하면, 한 국가의 제도 변화가 다른 회원국의 물류와 생산에 어떤 파급을 주는지 조기에 파악할 수 있다.
기업에 주는 신호
실무적으로는 다중 소싱, 근접 생산, 핵심 원자재의 전략 재고, 디지털 트래킹 등으로 대응 폭을 넓히는 단계다. APEC의 합의는 법적 구속력보다 예측 가능성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계약과 투자 판단의 신호로 기능한다.
디지털 연결과 데이터 신뢰
경계 없는 데이터, 경계 있는 규제
국경 간 데이터 이동은 서비스 무역의 심장이다. 동시에 개인정보와 기업 비밀, 보안 우려가 맞물리며 규제가 촘촘해졌다. 신뢰를 확보하지 못하면 디지털 경제의 확장성은 금세 한계에 부딪힌다.
신뢰 프레임의 구성 요소
상호 승인 가능한 프라이버시 기준, 인증 체계의 상호 호환, 데이터 현지화 규정의 예측 가능성, 그리고 분쟁 발생 시 신속한 처리 메커니즘이 핵심이다. 기술과 규범을 같이 다루는 것이 포인트다.
현장의 팁: 국경 간 데이터 처리 기업이라면 최소한의 공통 요구 사항을 내부 표준으로 고정하고, 각국의 가이드라인 변화에 맞춘 버전 관리를 자동화해 리스크를 낮추는 편이 유리하다.
‘모두를 위한 AI’ 비전의 실제 과제
책임성과 접근성의 균형
AI는 생산성의 지렛대가 되지만, 편향, 저작권, 보안, 에너지 소비 문제를 동반한다. ‘모두를 위한 AI’라는 말이 의미를 가지려면, 모델의 안전성 기준과 투명한 운영 원칙이 경제 전반에서 공유되어야 한다.
APEC 차원의 가능성
회원 경제권이 산업별 고위험·저위험 사용례를 분류하고, 최소한의 공통 안전 요구 사항과 샌드박스 절차를 합의한다면 기업은 규제의 불확실성을 낮출 수 있다. 특히 중소기업을 위한 경량 모델, 교육·헬스·공공서비스 같은 공익 영역의 적용 가이드가 마련되면 파급력이 커진다.
현실적인 실행 포인트
- 데이터 거버넌스: 학습 데이터 출처 기록과 제거 요청 절차의 표준화
- 모델 카드/시스템 카드: 성능·한계·위험 통제를 문서화
- 공급망 관점의 AI: 모델·데이터·컴퓨팅 리소스의 복원력 관리
- 에너지·탄소 관리: 데이터센터 효율성과 재생에너지 조달 가이드
기업인들이 만든 변화의 궤적
APEC의 성과 뒤에는 늘 기업 현장의 제안과 실험이 있었다. 이동과 통관의 간소화, 디지털 신뢰 체계의 정착, 업계가 먼저 만든 모범 규약 등이 정책 전환을 이끌었다. 이 과정에서 각 산업의 리더십이 중요한 촉매가 됐다.
CEO 서밋은 ‘목소리’가 아니라 ‘안건’으로 평가받는다. 규제와 시장을 잇는 구체적 제안이 다음 해 작업계획으로 편입될 때 비로소 영향력이 생긴다. 올해도 공급망, 디지털, 인재 이동 같은 문제에서 기업 제안이 활발했다.
한국의 역할: 다자주의와 실행력
한국은 다자 협력에서 실행 중심의 중간재 역할을 자주 맡아 왔다. 표준과 산업 현장의 간극을 좁히는 데 강점이 있고, 반도체·배터리·조선·바이오 등 전략 산업의 공급망에서 허브로 기능한다.
의장국으로서 한국이 제시하는 의제는 대체로 실무에 닿아 있다. 공급망 복원력, 디지털 연결, 그리고 AI 안전성은 단지 선언이 아니라 ‘지금부터 적용할 절차’로 다뤄져야 한다. 그럴 때 지역 전체의 예측 가능성이 커진다.
향후 10년 로드맵: 6가지 체크포인트
다음 국면을 준비하기 위해 정책과 산업이 함께 확인해야 할 지점을 추려봤다.
- 복원력 지표의 표준화: 납기 준수율, 대체 조달 시간, 재고 회전일 등 공통 KPI 도입
- 공급망 투명성 기술: 시리얼라이제이션, IoT 트래킹, 위·변조 방지 태그의 상호 호환
- 디지털 신뢰의 기초: 개인정보·보안 인증의 상호 인정 범위 확대
- AI 안전·품질 기준: 산업별 고위험 사례 합의 및 시험·인증 인프라 공동 활용
- 인력 이동의 재설계: 숙련 인력의 패스트트랙과 원격 협업에 맞춘 비자 체계 개선
- 지속가능성의 내재화: 공급망 탄소 회계와 저탄소 조달의 단계적 의무화 로드맵
정책·비즈니스에 주는 실질적 시사점
정책 측면
정부는 규범의 상호 운용성과 분쟁 조정 속도를 높여야 한다. 복잡한 국면일수록 예측 가능성이 최고의 인센티브다. 민관 합동의 상시 대응 체계를 유지하면, 지정학적 충격의 경제적 파급을 선제적으로 줄일 수 있다.
비즈니스 측면
기업은 ‘레질리언스 회계’를 도입할 때다. 비용 항목에 복원력 투자를 명시하고, 공급망과 데이터 자산의 리스크를 재무적으로 가시화해야 한다. 또한 각국 규범의 공통분모를 내재화해 운영 복잡도를 낮추는 것이 장기 경쟁력으로 이어진다.
마무리: 연대는 왜 여전히 유효한가
경제의 파고가 높아질수록 이익은 가까운 곳에서, 신뢰는 넓은 곳에서 온다. APEC 36년은 그 사실을 반복해서 증명했다. 경주의 논의가 선언에 그치지 않으려면, 각자의 이해를 합의 가능한 규범으로 번역하는 수고가 필요하다.
연결은 단순한 구호가 아니다. 투자, 인재, 데이터, 기술이 이동하는 길을 정비하는 일이다. 다음 10년, 아시아태평양의 경쟁력은 그 길을 얼마나 매끈하게 유지하느냐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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