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행 택하는 석학들, 멈추지 않는 러브콜… 한국 R&D가 놓친 것들
KAIST 최연소 교수의 중국행이 상징하는 바는 명확합니다. 인재가 머무를 이유가 약해지고, 떠날 명분은 쌓였습니다. 지금 필요한 건 감정적 비난이 아니라, 연구자가 “여기서 더 잘한다”를 선택하게 만드는 시스템의 업데이트입니다.
개요: 개별 이직이 아니라 “시스템 시그널”
한 명의 유명 연구자가 다른 나라로 옮겼다는 뉴스는 늘 있어 왔습니다. 그런데 최근 흐름은 결이 다릅니다. 정년을 지난 베테랑뿐 아니라 왕성한 성과를 내는 핵심 연구자까지 이동하는 사례가 이어졌고, 그 배후에는 파격적인 처우뿐 아니라 장기 과제 중심의 자율성, 연구 행정의 간소화, 고경력 인력의 온전한 활용 같은 요소가 묶여 있습니다.
즉, “연봉” 하나로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연구자가 연구자답게 일할 수 있는 환경의 총합이 승부를 가릅니다. 그리고 그 총합에서 한국은 몇 가지 결정적 항목을 놓치고 있습니다.
왜 떠나는가: 연구자의 계산서에 찍히는 네 가지 항목
1) 보상 패키지와 초기 정착비의 간극
연봉은 표면입니다. 실제로는 초기 세팅 비용(랩 구축, 핵심 장비, 시드 펀딩), 가족 동반 이주 지원, 주거·교육 패키지 같은 총보상(Total Rewards)이 의사결정을 좌우합니다. 제안서가 “연구에 바로 몰입할 수 있는 준비된 생태계”를 약속할수록, 연구자는 안전하게 리스크를 감수합니다.
2) 연구 자율성과 장기성의 신뢰
단기 실적 중심 평가와 잦은 보고는 혁신과 거리가 멉니다. 기초·도전적 연구일수록 5~7년의 넉넉한 러닝타임이 필요하고, 실패 허용 한도가 있어야 합니다. 장비 도입·IRB·윤리심의 등 필수 절차는 유지하되, 심사·집행의 병목을 줄이는 게 핵심입니다.
3) 경력의 마지막 10년을 대우하는 방식
고경력 연구자가 떠나는 이유는 단순합니다. “여기서는 끝났다”는 신호를 받기 때문이죠. 퇴직 이후에도 PI(책임연구)·멘토·산학 브로커 역할을 설계해 주는 곳으로 인력이 이동합니다. 노하우의 잔존 가치는 숫자 이상입니다.
4) 생애주기 별 촘촘한 지원
박사후·신임교원·중견·시니어로 이어지는 생애주기 지원이 끊기면, 그 지점이 바로 이탈 구간이 됩니다. 특히 신임 단계에서의 초기 연구비·랩 빌드업 속도·핵심 인력 채용 자유도는 잔류 의지에 치명적입니다.
중국의 영입 방식: ‘돈’보다 ‘완성도’
중국의 오퍼는 고액 연봉이 눈에 띄지만, 실제로 강력한 건 시스템의 완성도입니다. 독립 연구비를 빠르게 집행하고, 대형 장비 접근성을 보장하며, 팀 구성을 PI 재량에 맡깁니다. 단기 논문 수보다 장기 어젠다를 밀어주는 구조가 특징입니다.
또한 정년의 경계가 느슨합니다. 경력 만기의 연구자에게도 프로젝트 오너십과 교육·고문 역할을 제시해 “경험의 수익화”를 돕습니다. 글로벌 공동연구를 적극 연결해, 영입된 인력이 국제적 평판을 유지·확장하도록 지원합니다.
핵심 포인트: 영입 이후 12~24개월 내 성과가 나오게 만드는 ‘온보딩 설계’가 뛰어납니다. 서류와 장비, 인력 채용, 거주, 자녀 교육까지 병렬로 세팅되는 셈입니다.
한국의 구조적 병목: 행정은 많고, 신호는 약하다
연구 행정의 무게
연구자는 아이디어에 시간을 써야 합니다. 그러나 보고·정산·중간평가의 빈도가 과도하면, 실험 설계와 데이터 해석의 시간이 줄어듭니다. 필요한 통제는 유지하되, 표준화·자동화로 서류의 양과 변동성을 줄여야 합니다.
정년과 활용의 간극
정년 규정은 제도의 문제라기보다 ‘활용 설계’의 문제입니다. 65세 이후에도 강의·공동연구·기술자문·스핀오프 멘토링 등으로 연결하는 트랙이 촘촘해야 합니다. 경력의 마지막 10년을 생산적으로 디자인하는 조직이 인재를 붙잡습니다.
생활의 디테일
주거·캠퍼스 식당·자녀 돌봄·통근 인프라 같은 일상 요소는 생각보다 큰 변수입니다. “밥값 1000원”이 상징하는 바는 생계가 아니라 존중의 신호입니다. 작은 개선이 현장의 사기와 충성도를 바꿉니다.
숫자로 본 징후: 이직, 제안, 그리고 목적지
최근 수년간 정부출연연·대학에서 연구자 이직이 꾸준히 늘어났습니다. 특히 대학으로의 이동 비중이 높고, 해외 기관의 영입 제안이 빈번합니다. 제안의 다수가 중국에서 온다는 점은, 그들이 얼마나 집중적으로 한국의 인재풀을 주시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정량 수치는 기관별 공개자료와 현장 증언을 종합한 추세 해석입니다.
실행 가능한 해법: 12개월·36개월·60개월 플랜
단기(12개월): 당장 체감되는 변화부터
- 신임 PI 패스트트랙: 랩 구축비·핵심 장비·1~2명 코어 스태프를 계약일로부터 90일 내 확보
- 행정 번들링: 과제 회계·정산·보고 템플릿을 통합하고, IRB/윤리심의 병렬 심사
- 생활 지원 신호: 연구단지 내 주거·통근·급식·보육 서비스 소규모라도 즉시 개선
- 시니어 트랙 파일럿: 65+ 고경력 연구자 대상 멘토·컨설턴트·공동 PI 제도 운영
중기(36개월): 평가·예산의 구조 바꾸기
- 장기·도전형 과제 비중 확대: 5~7년 트랙을 명시하고, 중간평가를 진입장벽이 아닌 코칭으로 전환
- 총량 규제보다 성과기반 신뢰: 실패의 학습을 반영하는 포트폴리오 평가 도입
- 국제 공동랩: 해외 우수 기관과 대칭형 공동랩 설립, 연구자 상호 파견 상시화
- 산학 브리지: 대기업·글로벌 파운드리·바이오파운드리와 표준 협약 체결
장기(60개월): 경력의 마지막 10년을 디자인
- 에메리투스+α: 고경력 연구자에게 독립 시드·멘티 매칭·스핀오프 동반 프로그램 제공
- 국가 인프라 오픈액세스: 대형 장비를 기관 경계를 넘어 이용하는 통합 예약·요금체계
- 글로벌 리텐션 펀드: 외부 오퍼 수신 시 매칭 지원과 연구 자율성 보장을 결합한 잔류 옵션
윤리·보안 가드레일: 개방과 보호를 동시에
국제 협력은 필수지만, 핵심기술·개인정보·지식재산의 보호는 더욱 섬세해져야 합니다. 해킹, 기술 ‘택갈이’, 부적절한 연구윤리 이슈는 신뢰를 훼손하고 인재의 이탈을 가속화합니다. 연구지원 시스템의 보안 점검과 교육, 성과 검증의 투명성이 함께 가야 합니다.
- 연구정보시스템 취약점 정기 점검 및 침투 테스트 상시화
- 공동연구 시 데이터 거버넌스 계약(접근권한·반출·AI 학습 활용 금지 범위 명시)
- 연구윤리 사전 심의 강화와 외부 전문가 교차 검증
기관을 위한 12문항 셀프체크
- 신임 PI가 90일 내 연구를 시작할 수 있는가?
- 핵심 장비 예약·사용이 투명하고 빠른가?
- 보고·정산 템플릿이 통합되어 있는가?
- 외부 오퍼 대비 잔류 매칭 옵션이 있는가?
- 65+ 시니어의 역할 트랙이 공식화되어 있는가?
- 생활 인프라(주거·보육·급식) 개선 로드맵이 있는가?
- 장기·도전형 과제 비중이 증가하고 있는가?
- 실패의 학습을 반영하는 평가 기준이 있는가?
- 국제 공동랩·상호파견이 상시 운영되는가?
- 대형 장비의 기관 간 오픈액세스가 가능한가?
- 보안 취약점 점검·침투 테스트가 정례화되어 있는가?
- 연구윤리·데이터 거버넌스 교육이 의무화되어 있는가?
Q&A: 자주 받는 질문, 간단히 정리
Q. 연봉을 올리면 해결되나요?
A. 연봉은 시작일 뿐입니다. 초기 연구 세팅, 자율성, 팀 구성 권한, 생활 인프라, 장기 과제 비중이 함께 개선되어야 효과가 납니다.
Q. 정년을 없애면 되나요?
A. 핵심은 ‘활용 설계’입니다. 강의·공동연구·멘토링·기술사업화 등 역할 트랙을 촘촘히 설계해 경력 가치를 잇는 게 더 현실적입니다.
Q. 중국의 영입을 막을 수 있나요?
A. 막는다는 관점보다, “여기서 더 잘할 수 있다”는 선택지를 만드는 게 답입니다. 연구 품질과 삶의 질이 동시에 설득력 있어야 합니다.
마무리: ‘머물 이유’를 디자인하는 나라
좋은 연구는 좋은 환경에서 나옵니다. 연구자가 행정보다 가설에 시간을 쓰고, 실험보다 보고서를 먼저 걱정하지 않으며, 경력의 마지막 10년이 가장 생산적일 수 있다는 확신을 줄 때 인재는 남습니다. 지금의 논쟁은 결국 한 문장으로 수렴합니다. 한국에서 연구자가 더 잘할 수 있게 만들 것인가.
답은 거창하지 않습니다. 작지만 확실한 변화부터, 빠르게. 그리고 오래 가는 제도로. 우리는 이미 필요한 요소들을 알고 있습니다. 이제 실행만 남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