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가리 막걸리’ 재심 무죄…16년 만에 드러난 위법수사, 무엇이 뒤집었나
광주고법이 ‘청산가리 막걸리’ 사건 피고인 부녀에게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재판부는 검찰의 강압·위법 수사를 인정하고, 자백과 관련 진술의 증거능력을 전면 배제했습니다. 무엇이 2심 유죄를 뒤집고 1심 무죄로 되돌렸는지, 판결의 핵심 논리를 정리했습니다.
핵심: 자백 배제, 절차 위법, 과학적 불일치, 피의자 권리 침해
사건 한눈에 보기
이 사건은 2009년 7월 전남 순천 황전면에서 벌어진 집단 중독 사건에서 출발합니다. 마을 주민들이 함께 마신 막걸리에서 독성물질인 청산가리가 검출됐고, 2명이 숨지고 2명이 중상을 입었습니다. 이후 피해자 중 한 명의 남편과 그의 딸, 즉 부녀가 범인으로 지목돼 기소됐습니다.
초기 재판에서 1심은 무죄였지만, 2심은 이를 뒤집어 부녀에게 각각 무기징역과 징역 20년을 선고했고 대법원에서 확정됐습니다. 다만 2024~2025년에 이르러 재심이 개시되면서 사건의 여러 단면이 다시 검토됐고, 16년 만에 무죄 판결이 내려졌습니다.
핵심 인물: A씨(아버지, 문맹 수준), B씨(딸, 경계성 지능). 주요 쟁점: 자백의 임의성, 조사 절차의 적법성, 과학적 증거의 정합성, 유리한 증거 미제출.
재심 무죄의 결정적 이유
1) 자백의 증거능력 부정
재판부는 검찰 조사가 강압적이었고, 유도신문이 반복됐다는 점을 근거로 자백과 관련 진술의 적법성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피의자 신문조서 작성·열람 과정에서 기본권이 보장되지 않았다는 점이 결정적이었습니다.
2) 과학적·객관적 증거의 공백
막걸리에서는 청산가리가 검출됐지만, 현장 전반에서 일관된 독성 흔적이 확인되지 않았고, 범행도구로 지목된 플라스틱 수저에서도 성분이 검출되지 않았습니다. 현장검증에서 제시된 투여량과 정밀분석을 통한 추정치 사이에도 괴리가 있었습니다.
3) 피의자 권리 침해
진술거부권 고지, 변호인 또는 신뢰관계인 동석, 조서 열람·정정권 등 기본적 권리가 보장되지 않았습니다. 취약한 피조사자 특성을 고려하면 절차 보장은 더욱 엄격해야 했지만, 이 부분이 무너졌다는 판단입니다.
4) 유리한 증거의 미제출
막걸리 구매 동선과 부녀의 실제 행적이 맞지 않음을 시사하는 CCTV 등 피고인에게 유리한 자료가 재판에 충분히 제시되지 않았던 점도 재심 판단에서 문제로 지적됐습니다.
자백 배제: 왜 허위로 판단됐나
장시간 조사와 유도신문의 결합
재심 법원은 부녀가 장시간 조사 과정에서 압박을 받았고, 질문 방식이 “정답을 유도”하는 형태였다고 봤습니다. 이는 취약한 피조사자에게 특히 치명적입니다. 반복적·폐쇄형 질문은 피조사자가 조사자의 기대에 맞춰 진술을 ‘맞추는’ 결과를 낳기 쉽습니다.
조서의 적법성 자체가 무너짐
2007년 개정 형사소송법은 피의자신문조서의 증거능력에 대해 절차와 방식의 적법성을 강조합니다. 재심 법원은 열람·정정권 행사, 권리고지, 동석권 보장 등이 미비했다고 보고, 조서 자체의 증거능력을 부정했습니다. 이는 단지 ‘임의성 다툼’을 넘어 조서 전체의 효력을 흔드는 판단입니다.
문맹·경계성 지능이라는 취약성
A씨는 글을 제대로 읽고 쓰지 못했고, B씨는 경계성 지능으로 독립적 의사결정이 어려운 상태였습니다. 이러한 특성을 고려하면, 자필 진술서의 정교함과 조사녹화 영상의 문답 패턴은 오히려 외부 개입 및 답안 유도 정황과 부합합니다.
재판부 취지: “경계성 지능을 가진 피고인, 문맹 수준의 피고인에게 신뢰관계인 동석 없이 이뤄진 자백은 증거능력이 없다.”
과학증거의 빈틈과 현장 불일치
분명 막걸리에서 청산가리는 검출됐습니다. 그러나 재심 판단은 “검출 자체”가 아니라 “누가, 어떻게, 어느 정도의 양을, 어떤 도구로 넣었는지”를 과학적으로 일관되게 설명할 수 있는지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도구-성분의 미검출
범행 도구로 특정된 플라스틱 수저에서 청산염이 검출되지 않았다는 점은, 범행 시나리오의 직접성에 의문을 남깁니다. 독극물 취급에서 남기 쉬운 잔여물과 접촉 흔적이 없었다는 것은, 적어도 ‘특정 도구를 통한 투여’설의 신빙성을 낮춥니다.
투여량·희석량의 괴리
현장검증에서 재현된 투여량과 이후 정밀분석에서 추산된 희석·분포량 사이에는 유의미한 차이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공백은 가해 방법과 시간대, 혼합 경로에 대한 합리적 의심을 키웁니다.
현장 전반의 잔류 패턴
독성물질이 사용됐다면 주변 용기, 표면, 취급 도구에 미량이라도 잔류 패턴이 나타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러나 이 사건에서는 막걸리 외 현장 전반에서 일관된 패턴이 부족했습니다. 이는 범행 구성요건을 입증할 ‘연결고리 증거(chain of evidence)’가 약했다는 뜻입니다.
피의자 권리 침해와 절차 위법
권리고지와 동석권의 부재
진술거부권, 변호인 또는 신뢰관계인 동석권, 조서 열람·정정권은 피조사자가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한 최소한의 절차입니다. 재심 법원은 이 기본적 권리가 실질적으로 보장되지 않았다고 판단했습니다.
조서 열람·정정의 형식화
장시간 신문 직후 불과 몇 분 만에 끝난 열람·정정 절차는 형식적 확인에 그쳤다는 지적을 받았습니다. 특히 문자 이해가 어려운 피조사자에게는 실질적 설명과 보조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예단과 편향된 질문
재판부는 수사기관이 ‘범행 동기’를 특정 가설에 맞춰 예단하고 그 방향으로 질문을 몰아간 점을 위법으로 봤습니다. 의심은 수사의 출발점일 수 있지만, 증거 없는 확신은 인권침해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1·2·대법원·재심, 판결 흐름 비교
1심: 합리적 의심의 여지 남김
1심은 자백의 신빙성에 의문을 제기하며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과학적·절차적 기반이 충분치 않다는 판단이었습니다.
2심: 자백의 신빙성에 무게
반대로 2심은 자백과 부수 진술에 큰 비중을 두며 중형을 선고했습니다. 이후 대법원에서 확정까지 이르렀습니다.
재심: 조서의 적법성부터 재점검
재심은 2심의 핵심 근거였던 자백·진술의 증거능력 자체를 다시 들여다봤습니다. 결과적으로 조서의 적법성이 무너지며, 과학증거의 빈틈과 유리한 증거 미제출 문제까지 결합되어 무죄로 방향이 바뀌었습니다.
교훈: 자백 중심 유죄 구조는 절차적 보호장치와 과학증거의 교차검증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취약합니다.
남은 질문: 책임, 보상, 재발방지
책임 소재
강압·위법 수사 판단이 내려진 만큼, 조직 차원의 점검과 개인적 책임 범위가 쟁점이 될 수 있습니다. 당시 조사 관행, 문답 방식, 조서 작성 절차 등을 면밀히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국가배상과 형사보상
장기간의 수형 생활을 보낸 피고인들에게는 형사보상 및 국가배상 청구가 이어질 수 있습니다. 보상 산정에서 구금 기간, 건강·생계 피해, 사회적 낙인 등 비경제적 손해를 포함한 실질적 복구가 중요합니다.
제도 개선
- 취약 피조사자에 대한 의무적 변호인·신뢰관계인 참여 확대
- 신문 전 과정의 전면 영상녹화 의무화 및 증거개시 강화
- 자백 보강법칙의 실질화: 과학적·객관적 증거의 독립적 교차검증
- 검찰·경찰 공동의 조사기법 표준화와 인권교육 상시화
전문가 시각: 취약 피조사자 조사원칙
국내외로 축적된 연구에 따르면, 경계성 지능, 발달·인지적 취약성을 가진 피조사자는 ‘순응성’이 높아 유도적 질문에 취약합니다. 이들은 높은 스트레스 상황에서 질문자의 방향성을 맞추려는 경향을 보이기도 합니다.
권고되는 실무 가이드
- 개방형 질문을 우선하고, 확인 질문은 중립적 어휘로 반복 최소화
- 쉬운 언어로 권리고지, 이해도 점검(teach-back) 절차 도입
- 신뢰관계인 또는 전문 조력인 상시 동석, 면담 시간과 휴식 규정화
- 조서 열람·정정은 충분한 시간과 설명을 전제로 진행
이번 재심은 이러한 원칙이 현장에 뿌리내리지 못했을 때 어떤 결과가 나올 수 있는지를 보여준 사례로 기록될 것입니다.
정리: 왜 이번 무죄가 중요한가
이번 재심 무죄는 단순히 한 사건의 결말이 아닙니다. 자백 중심 수사의 취약성과 절차적 정의의 중요성을 재확인한 판결입니다. 특히 조서의 적법성을 엄격히 따지는 법원의 태도는 이후 사건들에도 적잖은 영향을 줄 것입니다.
더불어 과학증거의 일관성, 유리한 증거의 공정한 제출, 취약 피조사자 보호라는 세 축이 균형을 이뤄야 형사사법이 신뢰를 얻을 수 있음을 상기시킵니다. 사회적 낙인은 쉬이 찍히지만, 그 낙인을 지우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이번 판결이 제도 개선과 인식 전환의 출발점이 되길 바랍니다.
추가 맥락: 사건을 바라보는 책임 있는 자세
사건의 규모와 충격성, 선정적 동기 추정은 언제나 대중의 관심을 불러옵니다. 하지만 형사사법 절차에서 필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정확성입니다. 그 정확성은 인권 보장, 증거의 투명성, 반대 증거의 개방에서 비롯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의심의 균형감’입니다. 의심이 수사의 동력이 되는 것은 맞지만, 확증편향으로 곧장 달려가지 않도록 제도와 문화가 브레이크 역할을 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