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형이 전한 고 이순재의 마지막 부탁: “앞으로 연극계는 네가 맡아라”
무대 위에서 평생을 함께해 온 선배를 떠나보낸 뒤, 배우 박근형은 담담하게 ‘남겨진 몫’을 이야기했다. 그가 전한 고 이순재의 마지막 한마디는 한국 연극계가 다시 바라봐야 할 책임의 방향을 분명히 했다.
세 사람의 시간, 그리고 빈자리
연극계에서는 오래전부터 ‘셋이 늘 함께하던 시간’이라는 말이 있었다. 중심엔 늘 이순재가 있었고, 곁에 신구와 박근형이 있었다. 작품을 보며 의견을 주고받고, 무대 얘기로 밤을 새우기도 했다. 그 시간은 특별한 의식 없이도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박근형은 그 시간을 떠올리며 담담하게 말했다. 오랜 세월 동고동락한 선배를 떠나보낸 상실감은 크지만, 그가 남긴 말의 무게가 마음을 계속 붙잡고 있다고. 연극이란 결국 사람의 손과 몸과 시간이 만든 결과물이고, 그 연속성을 지켜야 한다는 뜻을 누구보다 잘 아는 이들이다.
그 ‘빈자리’는 생각보다 크게 느껴진다. 무대를 지키는 태도의 기준을 직접 보여 준 사람, 말보다 먼저 실천하고 다시 무대로 돌아오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추모의 문장보다도, 다음 연습실로 향하는 발걸음이 더 조용히 깊다.
“앞으로 연극계는 네가 맡아라”라는 말의 진심
“앞으로 연극계를 네가 맡아야 한다. 우린 늙어서 많이 못하니까, 앞으로 열심히 해줘.”
박근형이 전한 이순재의 마지막 당부는 유언처럼 무겁고 절대적인 선언이 아니라, 후배에게 건넨 조용한 바톤 터치에 가깝다. 역할과 책임, 그리고 무대를 향한 태도를 잇는 일. 그 말을 들은 순간에는 웃어 넘겼지만, 이제는 그 문장이 매일의 준비 시간마다 떠오른다고 한다.
이 말엔 몇 가지 층위가 있다. 첫째, 연극계의 안팎을 돌보라는 당부. 둘째, 작품을 고르고 지키는 눈을 잃지 말라는 조언. 셋째, 후배 배우들이 무대에서 성장할 수 있도록 공간을 열어 달라는 부탁. 단 하나의 구절이지만, 공동체 전체가 움직여야 이뤄질 과제들이다.
어떤 당부는 크게 외칠수록 희미해진다. 이순재의 말이 오래 남는 이유는, 오히려 간결했기 때문이다. ‘열심히 해달라’는 말은 결국 무대에서 증명하라는 뜻이다.
박근형이 본 ‘인간 이순재’
선배의 성품을 묻는 질문에 박근형은 늘 비슷하게 답해 왔다. 배려와 이해. 그는 상대의 장점을 먼저 발견했고, 의견이 부딪혀도 사람을 존중했다. 무대에 서는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자질은 기술보다 태도라는 것을, 현장에서 익히게 한 사람이다.
그의 일화들 가운데 특히 마음을 잡아끄는 장면이 있다. 시력이 거의 남지 않은 상태에서도 대본을 붙잡고 연습을 멈추지 않았다는 이야기. “하고 싶은 건 작품밖에 없지”라는 짧은 대답에는, 늙어가는 몸을 핑계 삼지 않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었다. 예술을 직업으로 삼는다는 건 이런 식의 책임을 매일 결제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이런 태도는 박근형에게도 깊게 남았다. 어느덧 80대 중반인 그는 여전히 무대를 향한다. 선배가 보여준 ‘끝까지의 예의’를 자기 방식으로 이어가는 셈이다.
한국 연극계가 지금 마주한 질문들
‘연극계를 맡아 달라’는 말은 추상적이지 않다. 지금의 현장에는 분명한 과제가 쌓여 있다. 창작극의 투자 구조, 중·소극장의 운영 안정성, 배우와 스태프의 노동 환경, 그리고 관객의 세대 교체. 하나하나가 공연 한 편의 흥행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현장의 목소리를 합치면 방향이 선명해진다. 젊은 창작자들이 실패를 감당할 수 있는 안전망, 배우들이 쉬지 않고 연습할 수 있는 리허설 룸의 물리적 확충, 객석과의 접점을 넓히는 학교·지역 연계 프로그램. 박근형이 언급한 ‘연극을 사랑한 선배의 마음’을 정책과 시스템으로 번역해야 한다.
관객의 경험도 달라져야 한다. OTT와 짧은 영상에 익숙한 세대에게 연극은 낯설다. 그러나 현장성은 여전히 강력한 매력이다. 커튼콜에서 배우의 땀과 숨이 그대로 느껴지는 순간이야말로 공연예술의 핵심 가치다. 관객이 그 현장성에 접속할 수 있도록 접근성을 높여야 한다.
무대를 지키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세 가지
- 안정적인 창작·제작 지원과 투명한 회계 구조
- 배우·스태프의 장기적 커리어 경로 설계
- 지역 소극장 네트워크의 실질적 연대와 교류
결국 중요한 건 ‘꾸준함’이다. 한두 번의 이벤트로는 체질이 바뀌지 않는다. 선배들이 지켜 온 것처럼, 매일의 연습과 공연이 쌓여 생태계를 만든다.
무대의 현재: 박근형과 ‘더 드레서’
박근형은 최근 연극 ‘더 드레서’에서 ‘선생님’ 역으로 무대에 서고 있다. 오래 지켜 본 이들은 그의 연기에서 호흡과 시선의 미묘한 속도를 먼저 이야기한다. 감정을 밀어붙이기보다 리듬을 조절해 관객이 따라올 여백을 남긴다. 그 여백이 극의 공기를 만든다.
‘더 드레서’는 노배우와 그를 보좌하는 드레서의 관계를 통해 무대 뒤의 세계를 들여다본다. 객석에선 보이지 않지만, 분장실의 정적과 대사의 호흡, 출입구 앞 10초의 침묵이 공연의 절반을 좌우한다. 박근형의 무대는 이런 ‘보이지 않는 시간’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그가 선택한 작품의 결은 우연이 아니다. 선배가 전한 당부를 무대 위에서 수행하겠다는 의지, 그리고 후배에게 나눠줄 수 있는 실천적 표본이 된다. 작품과 역할이 메시지가 되고, 그 메시지가 또 다른 공연으로 연결된다.
기억을 잇는 방법: 추모를 넘어 실행으로
우리는 종종 훌륭한 예술가를 떠나보내며 많은 말을 남긴다. 그러나 현장이 기억을 보관하는 방식은 다르다. 다음 작품, 다음 시즌, 다음 캐스팅으로 이어지는 과정이 곧 추모다. 무대는 늘 ‘다음’을 부른다.
따라서 기억을 잇는 일은 구체적이어야 한다. 선배들의 기록을 아카이브로 정리하고, 교육 프로그램으로 편집해 후배들이 쉽게 접근하도록 만드는 일. 오래된 대본과 연습 노트를 디지털로 보존하고, 공연 영상의 저작권을 정리해 연구자와 학생들에게 합법적으로 열어 두는 일. 이 모든 게 ‘연극계를 맡는다’는 말의 실제적인 형태다.
무엇보다 현장에서 존중의 문화를 재확인해야 한다. 예의와 배려는 단지 인성의 문제가 아니라, 작업 효율과 결과의 퀄리티에 직접 연결된다. 이순재가 몸소 보여준 태도는 결국 최고의 생산성으로 귀결됐다.
후배들을 위한 제언: 무대에서 오래 버티는 법
후배 배우와 스태프에게 가장 현실적인 조언은 의외로 단순하다. 몸과 목을 지키는 루틴, 꾸준한 텍스트 리딩, 기록하는 습관. 이 세 가지가 장기적인 생존을 좌우한다. 순간의 몰입은 강력하지만, 반복 가능한 지속가능성이 없다면 금세 지친다.
연습실에서 바로 쓸 수 있는 팁
- 호흡-발성-딕션을 15분 루틴으로 고정해 매일 같은 시간에 실시
- 공연 전후 5분의 ‘침묵 구간’을 마련해 감정의 온도를 정리
- 장면별 ‘행동 동사’ 목록을 작성해 감정이 아닌 행동으로 접근
- 리허설 노트에 ‘실패 기록’을 남겨 반복 학습의 근거 만들기
무대는 솔직하다. 준비한 만큼만 드러나고, 빈틈도 그만큼 드러난다. 박근형이 지금도 연습실에서 가장 먼저 대본을 펴는 이유는, 선배에게 배운 방식이 몸에 배었기 때문이다. 꾸준함이 실력이고, 실력이 곧 예의다.
정리하며: 한 문장이 남긴 길
“앞으로 연극계는 네가 맡아라.” 한 문장이 한 사람의 하루를 바꾸고, 한 현장의 방향을 굳힌다. 박근형은 그 말을 무거운 휘장처럼 걸지 않는다. 오히려 평소처럼 연습실 문을 열고, 사람을 모아 작품을 만든다. 선배가 원하던 방식 그대로다.
예술의 바턴은 화려하지 않다. 손에서 손으로, 느리지만 정확하게 전달된다. 관객이 느끼는 감동의 뿌리는 바로 그 전승의 과정에서 자란다. 오늘 밤도 어딘가의 어두운 무대에서 조명이 켜질 것이다. 그 빛 아래에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연극이 왜 필요한지를 확인하게 된다.
무대는 계속된다. 그 말이 곧 약속이고, 약속이 곧 책임이다.